연혁
후시미 이나리타이샤의 기원에 관해서는, “야마시로노쿠니 풍토기(山城国風土記, 교토 지역의 풍토나 문물, 역사를 기술한 고대의 서적)”의 일문에 “하타노 나카쓰야노 이미키 등의 먼 선조, 이로구노 하타노 기미가 과녁으로 쏜 떡이 백조로 변하여 솟구쳐 날아, 그 새가 내려앉은 산의 봉우리에 ‘이네(稲, 벼)’가 생겨났다는 상서로운 조짐에 의해, 이나리라는 신사명이 생겼다”고 기록되어 있으며, 또한 “신기관감문”과 “연중행사비초”등에 인용된 “이나리샤 니의축등신상”에는 “이 신은, 와도 연중, 처음으로 이나리 세 봉우리의 편평한 곳에 현좌한 이래, 하타씨 등이 네기(禰宜, 신직의 하나) 및 하후리(祝, 신직의 하나, 네기의 차위)를 담당하여 봄가을 제사를 올렸다”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.
또한 다른 신사기록인 “십오개조구수전지화해”에는 “겐메이 천황의 와도 4년 2월 임오의 날에, 후시미 이나리타이샤가 있는 교토 및 후카쿠사 지역을 다스리던 장자 이로구노 하타노 기미가 칙명을 받아, 삼위의 신을 이나리산의 세 봉우리에 모신 것을 시작으로 하여, 그 해에는 오곡이 크게 결실함과 더불어 누에를 치고 명주를 잘 짜게 되어, 천하의 백성이 풍성한 복을 얻었다”고 전해지고 있습니다.
이와 같이, 이 곳 후시미, 후카쿠사 지역은 하타씨와 극히 깊은 관련이 있으며, 진좌는 와도 4년(711) 2월, 첫 번째 말의 날이라고 전승되어 왔습니다. 그러나 신앙의 기원은 이것보다 더욱 위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.
와도 4년(711) | 이나리 오카미, 야마시로노쿠니(현 교토) 기이군 이나리산의 세 봉우리에 진좌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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덴초 4년(827) | 토지라는 절의 탑을 세우기 위해 신목을 벌채한 지벌로 병마가 발생함으로써 이나리신에 “종오위하(従五位下, 신의 위계 중 하나)”라는 관직을 하사하다 |
엔기 8년(908) | 후지와라노 도키히라, 이나리 신사의 3개 신사를 중수하다 |
엔초 5년(927) | 927년 정리된 “엔기 식신명초”라는 일본 전국 신사일람에 야마시로노쿠니 기이군에 있는 이나리 신사 삼좌, 메이신타이샤(名神大社, 특히 영험이 있는 신의 임시 제사를 지내는 신사)라고 기록되어 있다 |
덴교 5년(942) | “정일위(正一位, 신의 위계 중 최고위)”로 승진 |
조호 2년(1000) | 세이 쇼나군(966-1025)의 “마쿠라노 소시(枕草子, 헤이안 시대에 궁중에서의 생활을 담은 여류 수필문학)”에 2월 첫 번째 말의 날, 이나리산에 참배하고, 중신사의 근처에서 극심한 고통을 참아내고 올랐다는 것이 기록되어있다 |
엔겐 원년(1336) | 고다이고 천황(1288-1339), 신기를 받들어 모시고 요시노 지역에 잠행하셨을 때, 이나리 신사 앞에서 “깊고 어두운 밤에 길을 잃어 버리고 말았구나. 부디 나에게 세 개의 등을 내리소서”라고 와카(和歌, 일본의 전통시가) 한 수를 읊었다 |
오닌 원년(1467) | 오닌의 난이 일어나다 |
오닌 2년(1468) | 야마나 모치토요(1404-1473), 하타케야마 요시히로(1437-1491), 시바 요시카도(1445-?), 오우치 마사히로(1446-1495) 등의 병사가 호네카와 도켄(?-1468)을 이나리산에서 공격함으로 인해, 이나리 신사의 산상, 산하의 신전과 사당, 탑 등이 불타다 |
메이오 8년(1499) | 오닌의 난에 의해 소실된 신전을 재건축하다 |
덴쇼 17년(1589) | 도요토미 히데요시(1536-1598)가 누각문을 조영하여 봉납하다 |
겐로쿠 7년(1694) | 신전을 복원하다 |
메이지 4년(1871) | 간페이타이샤(官幣大社, 궁내성에서 공물을 봉납하던 격이 높은 신사)의 열에 들다 |
메이지 42년(1909) | 국보 보존법에 의해 당 신사의 본전, 국보로 지정되다 (현재, 중요 문화재) |
쇼와 21년(1946) | 종교 법인 후시미 이나리타이샤의 등기를 완료하다 |
쇼와 36년(1961) | 진좌 1250주년 봉축 대제를 거행하다 |
헤이세이 11년(1999) | 메이오 연도의 본전 조영 500주년 기념 대제를 거행하다 |
헤이세이 23년(2011) | 진좌 1300주년 봉축 대제를 거행하다 |